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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후 엘리자벳의 인생

    시씨(Sissi)라는 애칭으로 유명한 엘리자벳(1837∼1898)은 오스트리아 제일의 미모를 뽐냈던 황후입니다. 매우 당돌했지만 결국 역사속, 비극적인 황후로 기록됩니다. 그리고 그녀의 파란만장한 60년 세월은 뮤지컬과 영화 등 수많은 작품으로 전 세계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Theater an der W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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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뮤지컬 <엘리자벳>

    1992년 9월 3일, 미하엘 쿤체(Michael Kunze)가 각본 및 작사를, 실버스터 르베이(Sylvester Levay)가 작곡을 맡은 뮤지컬 <엘리자벳>이 오페라 연출가 해리 쿠퍼(Harry Alfred Robert Kupfer)의 손을 거쳐 비엔나의 안 데어 빈 극장에서 초연을 올렸습니다.

    독일어권 뮤지컬 최대의 흥행작이 된 <엘리자벳>은 저물어가는 제국을 눈앞에 둔 채 현대적이고 자유분방한 감성과 고민을 함께 품었던 엘리자벳의 삶을 그린 작품입니다.

    고작 열여섯 나이에 합스부르크 왕가로 시집간 어여쁜 소녀는 비엔나에서 전통과 격식을 중시하는 엄격한 궁정 생활이 자신을 기다릴 줄은 상상도 못 했죠. 권력 다툼의 한가운데, 괴로워하면서 수많은 고초를 겪은 엘리자벳은 자유를 그리며 방황하다가 서서히 토드(죽음)의 유혹에 빠져듭니다.

    초연으로부터 어언 30여년, 이제는 명실상부 정기적으로 막을 올리는 뮤지컬이 된 <엘리자벳>은 해마다 한국을 포함한 세계 각지에서 공연되고 있습니다.

    매년 여름, 비엔나에서는 쇤브룬 궁전의 야외무대에서 콘서트 형식의 공연 <엘리자벳 콘서트 in 쇤브룬>이 펼쳐집니다. (2024년 6월 27일∼29일)

    성장기

    엘리자벳, 별칭 시씨는 1837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에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독일의 바이에른 공작 막시밀리안 요제프로, 시씨는 바이에른 왕국을 지배한 비텔스바흐 공작 가문의 자손이었던 것이지요. 비텔스바흐 가문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둘이나 배출한 명문 귀족입니다. 엘리자벳은 뮌헨에서 30킬로미터 떨어진 슈타른베르크 호수 근처 포젠호펜 성에서 자유롭고 개방적인 교육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황제가 첫눈에 반한 소녀

    1853년 8월 18일, 온천 명소 바트이슐(Bad Ischl)에서 열다섯 살의 엘리자벳 공녀는 이모의 아들, 즉 외사촌인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1830∼1916)와 약혼합니다. 일곱 살이나 많은 황제가 어린 소녀에게 청혼한 데는 사실 뜻밖의 사건이 있었습니다. 원래 황제와 약혼하기로 정해진 상대는 엘리자벳의 언니 헬레네였지요. 그런데 황제가 엘리자벳을 보자마자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겨 버렸답니다.

     

    약혼 후 행복한 여행

    약혼식을 치른 후 황제와 비텔스바흐 일가는 잘츠부르크로 향하던 중, 돌소금으로 유명한 호반의 푸르른 고장 할슈타트에 잠시 머물렀습니다. 할슈타트는 두 사람이 약혼 후 처음으로 함께 거닐던 곳이기도 하며, 특히 길을 더듬어 마을에 도착하면 산록에 층층이 지어진 집들이며 좁게 이어진 골목과 계단 등이 절경을 이룹니다.

    둘은 고자우호수에서 사냥을 즐기기도 했습니다. 명사수였던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바트이슐 근교에 사냥감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요. 특히 호수 주변 지리에 밝았기에 다흐슈타인의 산봉우리들을 거울처럼 맑게 비추는 아름다운 고자우호수로 엘리자벳을 데려가기도 했습니다. 사냥도 하고 사랑도 나누며 두 사람의 행복이 자연 속에서 함께 녹아든 달콤한 나날을 보냈습니다.

    잘츠부르크에 도착한 프란츠 요제프는 엘리자벳 일행을 배웅했습니다. 프란츠 요제프는 조금이라도 이별을 늦추고 싶었으나, 나랏일이 쌓여 있었기에 달콤한 휴가를 끝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내정도 외교도 황제의 개인사를 기다려주지는 않으니까요. 황제는 엘리자벳과 함께 했던 기쁨을 곱씹으며 비엔나의 쇤브룬 궁전으로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결혼식

    이듬해 1854년 4월 24일, 비엔나의 아우구스티너 교회(Augustinerkirche)에서 성대한 결혼식이 열렸고 아름다운 황후는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23세, 엘리자벳은 겨우 16세였습니다.

    Nave of the Augustinian Church Vien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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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우구스티너교회

    1327년 완공된 아우구스티너 교회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결혼식이 대대로 거행된 장소로, 1736년에는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란츠 슈테판이, 1770년에는 마리 앙투아네트와 루이 16세(대리인)가 이곳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 성당의 볼거리는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넷째 딸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대리석 기념 조형물입니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가장 예뻐했고 정략결혼이 아니라 연애 결혼을 허락한 유일한 황녀였지요.

    신혼이 된 부부는 결혼 후 쇤브룬 궁전에서 지냈습니다. 프란츠 요제프는 엘리자벳과 결혼을 계기로 프랑스 혁명군의 점령 당시 나폴레옹이 거주하다가 방치되었던 이 궁전을 개보수했습니다. 제2의 로코코 양식이라 할 정도로 화려하게 장식된 쇤브룬 궁전에서 아름다운 황비를 맞이한 것입니다. 그러나 동화처럼 행복한 신혼생활은 엘리자벳에게 비극의 시작이었습니다.


    시어머니와의 불화

    뮌헨에서 자유분방하게 자란 젊은 엘리자벳에게 황실의 전통은 몸에 맞지 않는 옷과 같았습니다. 유럽에서 가장 보수적이라고 알려진 비엔나 궁정의 법도 때문에 그녀는 삶을 옥죄는 느낌을 받았죠. 특히 엄한 시어머니 조피 대공비와의 관계는 최악이었습니다. 16세였던 엘리자벳은 결혼식을 마치고 겨우 2주 후를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작은 새는 새장 안으로 날아들었고 철창 문은 닫혔습니다. 나의 동경은 점점 커지기만 합니다. 자유, 당신은 나를 외면했어!”

    부부의 성격도 많이 달랐습니다. 꼼꼼하고 세심한 프란츠 요제프는 나랏일에 전념했지만, 엘리자벳은 자유를 사랑하고 독서를 즐겼으며 신화에 매료되었습니다.


    우울, 그리고 자유를 향한 갈망

    엘리자벳은 네 명의 자녀를 낳았습니다. 1855년에 조피(두 살에 사망), 1856년에 기젤라, 1858년에 황태자 루돌프, 그리고 1868년에 가장 소중히 여긴 딸 마리 발레리가 태어났지요. 황실의 관습에 따라 엘리자벳은 막내딸 마리 외에는 아이들을 직접 키울 수 없었습니다. 첫째 딸 조피가 겨우 두 살에 세상을 떠나자, 상처와 절망이 컸던 엘리자벳은 엄마로서, 아내로서, 그리고 합스부르크 왕가의 일원으로서의 삶을 거부했고 점차 바깥출입을 꺼리기 시작했습니다. 대신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궁 안에 욕조나 운동 기구 등을 설치하게 했습니다. 궁전 내부에 운동기구가 구비된 곳은 세계에서 비엔나뿐일지도 모릅니다.

     

    궁전 밖으로

    엘리자벳은 종종 비엔나 근교의 락센부르크(Laxenburg)에서 지냈습니다. 그곳에는 신선한 공기와 자연, 먼 곳까지 내달릴 수 있는 그녀의 애마도 있었습니다. 비엔나 서쪽 외곽, 광대한 라인츠 야생동물 보호구역 내에 자리한 헤르메스 빌라(Hermesvilla)는 1886년에 프란츠 요제프가 엘리자벳을 위해 세운 소궁전입니다. 하지만 이 궁전도 그녀를 비엔나에 머물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궁정 생활과 조피 대공비로부터 도망치듯 여행에 흠뻑 빠진 엘리자벳은 유럽 전역을 홀로 여행했습니다. 폐 질환을 앓았던 그녀에게 의사는 휴양지로 포르투갈의 마데이라 섬과 그리스의 코르푸 섬을 추천했습니다. 따뜻한 바닷가의 기온과 풍부한 자연은 그녀에게 새로운 에너지와 자신감을 주었습니다. 그곳에서 시씨는 집착적으로 미모 유지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고 전해집니다.


    “내게는 사랑도 없고 와인도 없어. 사랑은 악을 만들고 와인은 침을 만들지.”

    Sisi Museum - Vienna Hofbu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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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의 노예가 된 황비

    당대 최고의 미녀라 칭송받은 엘리자벳은 아름다움을 유지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했습니다. 하루 중 대부분을 외모 관리에 쏟아부었지요. 전속 미용사는 그녀의 굵고 긴 머리칼을 손질해 아름다운 곱슬머리로 만들었습니다. 머리카락이 빠지면 엘리자벳이 크게 역정을 냈기 때문에 바로 감추어야 했습니다. 2주에 한 번씩 코냑과 계란 노른자로 머리를 감았고 머리가 무거워지면 리본으로 묶었습니다. 또 바닷소금과 올리브오일을 넣어 입욕하는 게 그녀의 일과였습니다. 식사량은 적고 운동량은 많았는데 시녀가 따라잡지 못할 정도로 걸음걸이가 빨랐다고 합니다. 잘록한 허리를 유지하는 일, 윤기나는 머리카락을 유지하는 일은 그녀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었고 코르셋의 끈을 조이는 데 몇 시간을 쓰는 건 일상이었습니다.

    엘리자벳은 우울증과 거식증으로 고생했습니다. 공복 상태에서의 식사나 과도한 운동은 생활의 일부였습니다.

    황제의 정부

    엘리자벳에게 결혼생활은 점점 버거운 짐이 되었습니다. 프란츠 요제프는 엘리자벳을 매우 아꼈다고 전해지지만, 그에게는 정부가 여럿 있었고 그중 한 명은 엘리자벳이 의도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황제를 여배우 카타리나 슈라트와 교제하게 함으로써 그녀는 자유에 대한 갈망을 채우고 더욱 자유로이 여행할 수 있게 되길 원했던 것이지요. 가정에서는 시어머니로부터 압박을 받지 않아도 되었고 자녀 양육도 직접 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넷째 딸 마리 발레리는 어릴 때부터 곁에 두고 직접 돌볼 수 있었습니다. 당시 엘리자벳은 오스트리아 황후이면서 헝가리의 여왕이기도 했습니다.


    아들의 자살과 상복의 시대

    아들의 자살로 엘리자벳은 상실의 시기를 맞았습니다. 1889년 1월 30일, 서른 살의 황태자 루돌프가 비엔나 근교 마이어링(Mayerling)의 별장에서 자살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아들이 죽은 이유를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기에 엘리자벳은 극심한 무력감과 비참함에 사로잡힐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엘리자벳의 막내딸 마리 발레리는 일기에 “엄마는 루돌프 오빠의 죽음을 따라가려했고 밤낮으로 오빠를 그리워했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이 사건 이후 엘리자벳은 오로지 검은 옷만 입었습니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1898년 암살당하기까지 그녀의 파괴적이고 불안정한 심리상태가 지속되었고 우울을 가슴에 품은 채 끊임없이 해외를 여행했습니다.

    “인생이란 무의 끔찍한 방해입니다.”

    Imperial Carriage Museum Vien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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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들 루돌프의 죽음

    기혼자인 오스트리아 황태자 루돌프와 겨우 열일곱 살의 마리 베체라(알빈 폰 베체라 남작의 딸)의 동반자살 사건은 당시에 유럽뿐 아니라 전 세계에 충격을 준 큰 사건이었습니다. 나중에 ‘덧없는 사랑 노래’로 사람들에게 전승되었고 비극의 무대가 된 별장은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명령으로 네오고딕 양식의 카르멜파 수도원으로 재건축되었습니다.

    황후 암살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엘리자벳이 생에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었습니다.

    1898년 9월 10일, 엘리자벳은 경찰의 경호를 거부하고 호엔엠스 백작 부인이란 이름으로 제네바에 머물었습니다. 레만 호반에 위치한 보 리바쥐 호텔에서 외출한 그 때, 쇠줄처럼 날카로운 칼이 엘리자벳의 심장을 찔렀습니다. 엘리자벳은 상처가 크지 않다고 생각하여 시녀와 함께 몽트뢰로 돌아가는 증기선에 올라탔습니다. 그러나 겨우 두 시간 후 그녀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범인인 이탈리아의 무정부주의자 루이지 루체니는 원래 이탈리아 국왕 움베르토 1세를 암살할 계획이었으나 여의치 않아, 그를 대신할 만한 귀족을 죽여야겠다고 생각하던 중 마침 그곳에 있던 엘리자벳을 충동적으로 암살한 것이었습니다. 불운한 사건이었습니다.

    엘리자벳 황후의 알려지지 않은 모습

    시씨박물관

    호프부르크 왕궁 안에 지은 박물관. 엘리자벳이 바이에른 왕국에서 지내던 소녀 시절부터 오스트리아 황후이자 헝가리 여왕이 된 후 제네바에서 암살 당하기까지의 삶을 수많은 전시품을 통해 되짚어봅니다. 화려한 드레스와 유명한 운동기구, 암살 당시 입었던 의상은 놓칠 수 없는 전시품입니다.

    호프부르크 왕궁에는 시씨박물관 외에도 황제의 아파트와 궁정 식기 컬렉션도 있어, 합스부르크 왕가 사람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습니다.

     

    시민정원에 세워진 시씨 동상

    건축가 프리드리히 오만이 제작한 대리석 기념비에는 ‘잊지 못할 황후 엘리자벳에게 오스트리아 국민이 변함없는 사랑과 충성으로 1907년에 이 기념비를 세우다’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부르크테아터(궁정극장)를 배경으로 아름다운 정원을 조망하면서 시씨가 조용히 미소짓고 있죠.

     

    아우구스티너교회

    1854년 4월 24일 ‘저녁 여섯 시 반, 혼인식을 올리기에는 괴상한 시간이었지만’ 프란츠 요제프 1세와 엘리자벳의 혼례가 치러진 교회입니다.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란츠 슈테판, 마리 앙투아네트와 루이 16세(대리인)도 이곳에서 혼례를 치렀지요.

     

    쇤브룬 궁전

    시씨와 프란츠 요제프 황제가 신혼을 보낸 궁전으로,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로크 양식 건축물입니다. 또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이곳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쇤브룬 궁전에는 1,441개의 로코코 양식의 방이 있고 그중 약 40개가 공개되어 있습니다. 아름답고 드넓은 정원, 언덕 위에서 비엔나 구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글로리에테는 물론, 현존하는 동물원 중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고 ‘유럽 최고의 동물원’으로 수 차례 선정된 쇤브룬 동물원도 꼭 들러야 할 코스입니다.

     

    비엔나 서부역(Westbahnhof)에 세워진 시씨 동상

    1860년 이 역에서 출발하는 철도 노선을 ‘황후 엘리자벳 철도(Privilegierte Kaiserin-Elisabeth-Bahn)’라 명명한 기념으로 세운 동상입니다.

     

    데멜 카페 (Demel)

    호프부르크 왕궁의 미하엘 성문 바로 근처, 과거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즐겨 찾던 과자점 데멜. 몸매 유지에 극도로 집착한 엘리자벳도 이곳의 제비꽃 아이스크림에 푹 빠져들었죠.

     

    카페 게르스트너 (Gerstner)

    데멜과 함께 게르스트너도 엘리자벳이 편애하던 과자점이어서 몇 번이나 은밀히 방문했다고 합니다. 깜찍한 통에 담긴 제비꽃 설탕 절임은 여행선물로 인기가 많습니다.

     

    시씨 예배당

    건축가 요한 A. 그라벤이 엘리자벳과 프란츠 요제프 1세의 결혼을 기념해 비엔나의 암 힘멜(Am Himmel)숲에 지은 비엔나 최초의 네오고딕 양식 건축물입니다.

     

    헤르메스 빌라

    라인츠 야생동물 보호구역 중앙에 위치한 후기 낭만주의 스타일의 헤르메스 빌라는 바이에른에서 온 엘리자벳에게 황제가 비엔나의 아름다운 풍광을 보여주기 위해 선물한 작은 궁전입니다. 구스타프 클림트가 디자인한 프라이빗룸이 있습니다.

     

    안 데어 빈 극장 (Theater an der Wien)

    1992년 뮤지컬 <엘리자벳>을 초연한 극장입니다. 모차르트가 작곡한 오페라 <마술피리>의 대본을 쓴 요한 에마누엘 쉬카네더가 극장을 지었으며, 1801년에 개관했습니다. <마술피리>에서 직접 파파게노 역을 맡아 열연한 쉬카네더를 기리기 위해 남겨놓은 ‘파파게노의 문’을 꼭 찾아보시길 추천합니다. 베토벤도 한때 이곳에서 음악감독으로 일하며 극장 한켠에서 지냈다고 합니다. 지금도 비엔나 극장에서는 날마다 오페라와 오페레타, 뮤지컬을 공연합니다.

     

    황실가구박물관

    합스부르크 궁전에서 쓰던 가구를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엘리자벳의 분신과도 같았던 검은 양산과 아들 루돌프가 잠들던 요람 등이 있습니다. 또 로미 슈나이더 주연의 유명한 3부작 영화 <시씨>에 사용된 오리지널 가구가 영화 스틸컷과 함께 장식되어 있습니다.

     

    카푸친 교회 황실묘지

    엘리자벳과 프란츠 요제프 1세, 루돌프 황태자 등 합스부르크 왕가 일원 148명의 숨결이 머무는 곳입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웅장하고도 화려한 납골묘도 들러보시길 추천합니다.

    바트이슐

    엘리자벳과 프란츠 요제프가 처음 만난 곳입니다. 바트이슐은 오랜 엣날부터 염분을 머금은 온천이 솟아나는 곳으로 유명했습니다. 프란츠 요제프의 어머니 조피는 불임으로 괴로워했으나, 의사의 권유로 바트이슐에서 휴양한 후, 아이가 들어섰기에 프란츠 요제프에게 ‘소금 왕자’라는 별명이 있습니다.

    바트이슐의 볼거리인 카이저 빌라는 프란츠 요제프와 엘리자벳의 결혼식을 축하하기 위해 황제의 부모가 하사한 여름 별장입니다. 건물을 상공에서 내려다보면 엘리자벳의 이름 첫 자인 E의 형태로 보입니다. 정원에는 프란츠 요제프가 엘리자벳에게 선물한 작은 대리석 궁전(현재는 사진박물관)이 있으며, 엘리자벳은 이곳에서 티타임을 즐겼습니다.

    바트이슐에서 가까운 지역에 엘리자벳이 자주 찾던 목초지 포스트알름(Postalm)이 있습니다. 현재는 그녀의 넋을 기리는 예배당을 방문할 수 있습니다.

     

    잘츠부르크

    엘리자벳은 잘츠부르크 거리도 여러 차례 방문했는데, 죽기 전에 오스트리아에서 마지막으로 들른 도시도 잘츠부르크라고 합니다. 중앙역이나 ‘엘리자벳 포어슈타트’라 불리는 구역 근처에는 지금도 황후를 기념하는 대리석상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첼암제

    첼암제에는 알프스의 산들과 빙하가 만들어낸 아름다운 첼 호수(Zeller See)가 반짝이고 있습니다. 1885년 엘리자벳은 이곳을 방문했는데, 해발 1,965m 높이의 슈미텐회에(Schmittenhöhe) 산을 혼자 힘으로 올랐습니다. 엘리자벳이 머문 산상 호텔 슈미텐회에 건너편에는 엘리자벳의 방문을 기념하는 예배당이 지어졌습니다. 또 첼호수를 한 바퀴 도는 유람선 중 하나에는 ‘황후 엘리자벳(Kaiserin Elisabeth)’이라는 이름이 붙어있습니다.

     

    텐넨가우(Tennnengau)의 츠비젤암호이테(Zwieselalmhütte)

    고자우 호수나 다흐슈타인을 조망할 수 있는 경승지로 시씨는 이곳이 마음에 들어 여러 차례 머물렀다죠.

     

    그로스글로크너산

    엘리자벳과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오스트리아 최고봉 그로스글로크너에서 파스테르체 빙하의 웅장한 절경을 즐겼습니다. 두 사람의 방문을 기념해 세운 ‘카이저 프란츠 요제프 회에’ 전망대는 지금도 오스트리아 알프스 관광의 중심지입니다.

     

    • 구글맵 리스트 "엘리자벳을 찾아서"에서는 엘리자벳의 발자취가 담긴 더욱 많은 지역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행을 계획하거나 현지 트래킹에서 유용하게 활용하실 수 있습니다.
    Sisi in the film, the biography of Romy Schneider, Hofmobiliendepot (Imperial Furniture Museum) / Hofmobiliendepot (Imperial Furniture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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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씨> 3부작

    엘리자벳이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은 바로 1950년대에 제작된 3부작 영화 <시씨>였습니다. 독일어로는 Sisi와 Sissi 둘 다 쓰고 있으나, 이 영화가 상영된 이후 Sissi로 더 많이 쓰이게 됐습니다. 극중 어린 황후 역을 맡았던 로미 슈나이더 또한 이 영화를 통해 단숨에 스타가 되었지요.

    이 작품에서는 사실성을 중시하기보다는 황후를 낭랑한 목소리의 천진난만하고 반항적인 소녀로 표현하고, 프란츠(프란츠 요제프의 애칭)를 떠받드는 존재로 묘사했습니다. 이런 묘사 방식은 조화와 이상적인 세계를 향한 동경이 강렬했던 세계대전 후의 전형적인 연출 스타일이었습니다.

    배우 로미 슈나이더에게 시씨라는 역할은 좋든 싫든 인생 최고의 역할이었습니다. 그녀는 시씨의 이미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쳤지만, 43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세상은 그녀와 시씨를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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