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슈페를
여행 작가 안시내가 찾아가는 <비포 선라이즈>
비엔나로 향한다는 내 말에 모두가 입을 모아 한 말이 있다.
“다른 건 몰라도 커피는 꼭 마시고 와!”
짐을 싸던 손을 멈추고, 인스턴트 커피를 뺀다. 커피의 도시에서, 인스턴트 커피가 웬말이냐 싶어서다.
비엔나에서 카페는 단순히 마시는 장소를 넘어 문화, 예술, 철학, 사회적 교류의 중심지로 자리 잡아왔다. 17세기 후반부터 이어진 커피하우스 문화는 작가와 음악가, 철학자들을 한데 모았다. 비엔나에서의 커피 한 잔이 무엇보다 기대될 수 밖에 없는 이유였다.
비엔나에 있는 수많은 아름다운 카페 중에서 유난히 가고 싶던 곳, 영화 <비포 선라이즈>에 나온 카페 슈페를(Cafe Sperl)에 들르기로 했다.
1880년에 문을 연 이곳은 시간이 멈춘 듯한 고즈넉한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다. 붉은 색의 소파, 샹들리에, 오래된 벽지까지. 그 무엇도 고치지 않은 채 예전의 그 모습 그대로다. 200년 가까이 되는 긴 세월의 흔적이 이곳에 켜켜이 쌓여있다.
<비포 선라이즈>에서 제시와 셀린은 이곳에서 손전화놀이를 하며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다.
소파에 앉아 서로 마주보며 “내가 고개를 돌릴 때 날 바라보는 눈빛이 좋아”라고 제시에게 수줍은 듯 말하는 셀린의 표정은 영화 속에서 쌓여가던 설렘을 증폭시킨다.
정말 많은 이들이 좋아하는 장면이지만 내가 영화 속에서 더 좋아하는 장면은 그들의 모습이 나오기 전 이 카페의 사람들을 연속적인 화면 전환을 통해 보여주는 장면이다. 비엔나에 머무는 이들을 고스란히 담았다.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며 토론하는 사람들,
카드 게임을 하는 이들,
에곤 실레에 관해 이야기하는 노인,
홀로 책을 읽으며 생각에 잠긴 이,
비엔나의 느린 시스템에 불만을 토로하는 미국인들,
커피 대신 와인과 맥주를 나누며 대화하는 이들,
그리고 셀린과 제시.
햇살이 쨍한 날, 비엔나의 사람들을 보기 위해 카페 슈페를로 향했다. 문을 열자 단정하게 옷을 갖춰입은 직원이 나를 맞았다. 마치 시간 여행을 안내해주려는 듯, 오래된 당구대와 그 위의 신문들을 지나 해가 가장 잘 드는 아름다운 창가 자리로 안내했다. 우유 거품이 풍성하게 올라간 멜랑쥬(Melange)를 주문했다. 아인슈패너와 함께 비엔나 사람들이 즐겨마시는 커피다.
신문을 하나 꺼내들고, 고소한 우유향이 가득 담긴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창밖으로 산책하는 비엔나 시민들이 보인다. 잔잔한 목소리로 가득 찬 카페 내부는 외부의 차가운 공기를 모두 차단한 듯 다정하다. 다분히 일상적인 이곳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결국 모든 낭만은 일상 속에서 길어지는 것임을.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로맨틱한 비엔나의 하루를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