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포 선라이즈>를 찾아
단 하루, 사랑에 빠지기에 충분한 시간
―――――
누구에게나 인생 영화는 있다. 걷다 보면 문득 장면이 떠오르고, 누군가의 말 속에서에서 주인공들의 대화가 생각나며, 어쩌다 영화 속 음악을 듣게 될 때는 다시 그 영화를 보게 되는. 수도 없이 봐도 질리지가 않는 영화. 내게는 ‘비포선라이즈’가 그렇다. 여행과 사랑을 아는 사람이라면 결국 사랑할 수밖에 없는 영화.
10년 전 떠난 첫 세계여행에서, 한 여행자에게 자신이 가장 사랑한다는 영화를 선물 받았다. ‘비포 선라이즈’. 이 낯선 영화는 내가 여행 중 가지고 있던 유일한 영화가 되었다. 자막이 없던 이 영화는 영어를 잘하지 못하던 내게 난처하게만 느껴졌다. ‘하루’, ‘비엔나’, ‘함께 여행하다.’같은 몇 가지의 단어만 귀에 들어왔다.
두 번째로 영화를 봤을 때는 약간의 맥락을 이해할 수 있었다. 부다페스트에서 출발해 비엔나로 향하는 기차에서 우연히 만난 두 사람은 비엔나를 함께 여행한다. 해가 뜰 때까지, 하루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동안 비엔나의 곳곳을 여행하며 사랑에 빠지는 내용. 그들의 대화에 참여하고 싶어 수도 없이 영화를 돌려봤다. 기차 안에서, 비행기 안에서, 숙소의 침대에 누워 같은 장면을 보고 또 봤다. 서서히 대사와 풍경이 보였다. 언젠가 사랑하는 이와 함께 비엔나를 떠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쯤, 일상이 기다리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세월과 함께 영화도 잊혀져 갔다. 때때로 누군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무엇이냐고 물어볼 때마다, 그건 고르기 어렵지만 내가 가장 많이 본 영화는 분명 ‘비포 선라이즈’ 일 거라 답했다.
영화가 나온 지 20년이 되었을 때, 서울의 한 독립영화관에서 다시 ‘비포 선라이즈’를 만날 수 있었다. 비로소 모든 내용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이 걷던 거리, 트램에서 만난 풍경, 우연히 만난 시인, 해가 저문 오페라 하우스의 노란 조명, LP가게에서 듣던 음악……. 단 하루만에 사랑에 빠질 수 있는 충분한 풍경이 그곳에 존재했다. 나는 곧장 비엔나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아직도 그곳의 모습이 여전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서.
비엔나에 도착했다. 쌀쌀한 공기가 코 끝을 자극했다. 이질적인 도시의 풍경에 걸음을 뗄 수가 없다. 누군가 시간의 수문을 잠근 듯, 영화 속 모습 그대로다. 마치 내가 타고 온 비행기가 타임머신이라는 착각이 들 정도다. 중세와 바로크 시대를 거쳐 현재까지 과거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 비엔나의 구시가지는 그 역사적 의미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어떤 장소들은 시간에 굴복하지 않음을, 이곳에 와서야 깨닫는다.
일주일의 비엔나, 낮에는 영화 속에서 셀린과 제시가 다녀간 장소들을 여행했다. 함께 음악을 듣던 레코드샵, 우연히 들어간 아름다운 성당, 도나우 운하와 커피하우스까지. 영화 속 장면들의 아름다움에 감탄하고,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목적 없이 걷기도 했다. 발이 닿는 곳곳이 아름다웠다. 어디든 여행지였다. 이곳을 여행한다면, 단 하루만에 사랑에 빠지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모든 공간에는 낭만이 서려있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도시에 사는 사람들을 보았다. 거리의 사람들은 휴대폰 세상에 매몰되어 있지 않았다. 길거리 소프라노의 음악에 귀를 기울였고, 겨울의 아름다움에 감탄했다. 서로의 눈을 마주하고 대화한다. 태블릿을 보며 식사하는 익숙한 모습을 이곳에서는 볼 수 없었다. 하루를 길어 올린 수많은 이야깃거리를 나누며 함께 하는 저녁. 나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정의한다. 타인과 세상에 대한 관심과 표현, 아름다움을 충분히 수용하는 태도, 그것을 함께 나누는 모든 행위. 저녁의 거리는 사랑으로 넘쳐흘렀다. 20년 전 제시와 셀린이 그랬던 것처럼.
저녁이 되면 나는 집 근처의 작은 바들을 쏘다녔다. 그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연극 배우, 셰프, 유학생, 뮤지션. 이곳에 머무는 사람들은 비엔나를 사랑했고, 그들이 사랑하는 비엔나를 여김없이 자랑했다. 숨겨진 바에 데려가거나, 자신이 만든 음식을 대접하기도 했다. 꼭 가봐야 할 곳들을 귀에 박힐 정도로 말하곤 했다. 그들이 비엔나를 보여주는 방식이 좋았다. 순식간에 일주일은 끝나갔고, 떠나는 기차안에서 나는 비엔나와 사랑에 빠졌음을 인정했다. 언젠가 곡 사랑하는 사람을 데리고 다시 와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영화의 말미에서 비엔나의 아름다운 배경을 뒤로 이별을 아쉬워하는 셀린에게 제시는 추억할 게 없는 이별이야 말로 최악의 이별이라고 말한다.
영화 속에선 이별했던 그들이지만, 서로를 향한 마음을 계속해서 품었다는 것은 결국 단 하루일일지라도 평생 새겨질 추억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거리 그 자체만으로도 기억할 것들이 넘쳐 흘렀던 비엔나여서 가능했던 것이 아닐까. 감독은 필연적으로 비엔나를 영화 속 배경으로 삼았을 것이다. 사랑에 빠지기에, 충분히 아름다운 도시이니까. 사랑의 도시 비엔나를 나 역시 평생 추억할 것이다.
안시내의 촬영지 탐방
비엔나 서역 (Westbahnhof)
셀린과 제시의 이야기의 시작점이자 종점이 된 역. 추후 대대적인 리모델링 공사를 거쳐 현재는 촬영 당시와는 다른 모습이다.마리아 암 게슈타데 교회 (Maria am Gestade)
고딕 양식의 아름다운 교회. 두 사람이 조용히 대화를 나누는 인상적인 장면이 촬영되었다.프란치스카너 광장 (Franziskanerplatz)
점술가를 만나는 카페 'Kleines Café'가 위치하는 아담한 광장이다.슈피텔베르크 지구 (Spittelberg)
돌길이 이어지는 예술적인 분위기의 거리. 두 사람이 밤거리를 함께 걷는 장면이 이곳에서 촬영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