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티나 미술관
여행 작가 안시내가 찾아가는 <비포 선라이즈>
아주 짧은 장면이지만 영화를 본 누구나가 기억하는 장면이 있다. 알베르티나 미술관(Albertina)의 테라스에 앉아 짧게 입을 맞추는 셀린과 제시. 뒤로 펼쳐지는 비엔나 국립 오페라극장의 야경은 마치 그들을 축복하는 듯 펼쳐진다.
<비포 선라이즈>에서 비엔나는 단순히 배경이 아닌 하나의 캐릭터처럼 느껴진다. 모든 풍경은 생생하게 살아 움직인다. 대화를 나누는 장소들은 그들의 사랑을 더욱 아름답게 만든다. 셀린과 제시가 그곳에서 나눈 대화가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그들이 나눈 대화는 도시의 몽환적인 야경과 완벽히 어우러지며 영화의 서사를 완성한다.
자신들이 마치 꿈속에 있는 것 같다고. 함께하는 순간이 비현실적이라고.
그들의 말처럼, 영화 속의 비엔나는 마치 꿈속의 세상 같다. 아름다운 풍경을 자양분 삼아 그들의 대화와 사랑은 계속해서 깊어진다. 단 하루 만에 사랑에 빠지기 위해서 비엔나만큼 적절한 도시가 있을까. 누군가와 만나 그곳을 여행하며 대화하는 곳이 비엔나라면 분명 나 역시 사랑에 빠졌을 것이다. <비포 선라이즈>는 감독 리처드 링클레이터가 이곳을 배경으로 선정한 것도, 비엔나가 단 하루 만에 사랑에 빠질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기 때문일 거다.
알베르티나 미술관으로 향했다. 수요일과 금요일엔 오후 9시까지 개장을 하기에, 여유로운 마음이 들었다. 미술을 전공한 내게, 이번 비엔나 여행은 특별했다. 자코메티와 모네, 샤갈과 마티스, 피카소와 드가까지. 어린 날부터 선망하던 화가들의 작품들이 이곳, 알베르티나 미술관에 있다.
입장하자마자 놀랐던 것은, 화려한 내부였다. 이곳은 단순히 작품을 전시하는 공간이 아닌, 비엔나의 예술이 온전히 담긴 공간이기 때문이다. 들어서자마자 합스부르크 왕가의 접견실을 만날 수 있는데, 웅장함에 잠시 말을 잃을 정도였다. 반짝이는 샹들리에에 관람객들은 눈을 떼지 못했다. 과거 합스부르크 왕가는 음악가뿐만 아니라 화가와 조각가들을 지원해주었다. 이런 후원 덕에 과거의 훌륭한 작품들을 현시대에 마음껏 만끽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모든 시대의 예술을 조망하는 알베르티나는 과거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는 오스트리아 예술의 연속성을 가장 잘 드러낸 곳이라 할 수 있겠다.
전시관은 최고의 미술관이라는 명칭에 걸맞게 시대를 풍미한 최고의 작가들, 현대 사회의 문제점을 예술 속에 잘 꼬집어낸 신진 작가들의 작품까지. 전시는 지루할 틈이 없이 구성되어있다. 온전한 하루를 이곳에서만 다 써도 후회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혼자온 여행자들이 가장 많이 보았던 비엔나의 여행지가 아닌가 싶다.
알베르티나 미술관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은 자코메티의 조각이었다. 얇고 길게 늘어난 인물상의 조각은 단순한 형태 속에서도 인간 존재의 본질을 꿰뚫고 있었다. 그의 작품 앞에서 잠시 멈춰 바라볼 때, 마치 고요한 대화 속에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모네의 연작 중 하나인 수련도 잊을 수 없다. 부드러운 붓질과 색채의 조화 속에서 시간이 멈춘 듯한 고요함을 느꼈다. 마치 미술관의 공간 전체가 작품 속 자연의 연못으로 변한 듯했다. 이렇듯 알베르티나는 고전과 현대를 잇는 특별한 예술적 체험을 선사한다. 때로는 미소 지으며, 압도적인 작품의 분위기에 감탄하며, 전시의 끝과 함께 마음속이 환호와 탄성 가득 찼을 때 쯤, 해가 저물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야경을 볼 수 있다는 알베르티나 미술관의 야외 테라스로 향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이 도심의 아름다움에 감탄하고 있다. 그들의 표정에서 흘러나오는 순도 높은 행복함이 이곳의 분위기를 더욱 따스하게끔 만든다.
미술관 뒤로 펼쳐진 비엔나 국립 오페라극장의 주황빛 조명을 한참을 바라보다가 한 커플을 만났다. 이들 역시 영화 <비포 선라이즈>를 보고 이곳에 여행을 온 여행자들이었다. 다부진 인상의 남자는 자신의 여자친구에게 오늘 이곳에서 프로포즈를 하겠노라고 내게 귀띔했다. 나는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을, 잘 기록해주겠노라고 약속하고 그들을 향해 카메라를 들었다.
해가 완전히 저물었을 때, 그래서 오로지 가로등과 따뜻한 색의 조명만이 그들을 비출 때 남자는 주머니 속에서 반지를 꺼냈다.
“Will you marry me?”
“Yes, of course!”
아름다운 두 연인은 이곳에서 평생을 약속했고, 그의 청혼과 동시에 풍경 속의 사람들은 모두 환호와 박수를 보냈다. 밤의 비엔나는 이들의 평생을 축복하는 듯 찬란하게 빛났다. 영화 속의 모습처럼 사랑의 온기는 자꾸만 퍼져나갔다. 꿈속보다 더 아름다운 세상, 내게 비엔나는 영원한 사랑의 도시다.
알베르티나에는 현재 50,000여 점의 그림과 수백만 점의 판화들이 있으며, 후기 고딕 시대부터 현대 미술에 이르기까지 주요 시대를 대표하는 작품들로 가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