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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기 음악 거장, 안톤 브루크너

    오늘날 안톤 브루크너는 19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작곡가 중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브루크너의 음악은 상반된 평가를 받았습니다. 오르간 연주자로서의 재능은 일찍 인정받았지만 그가 작곡한 교향곡의 반응은 좋지 못했습니다. 특히 비엔나 상류 사회에 어울리지 않는 독불장군이라고 알려졌던 브루크너는 노년에 이르러서야 동시대인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안톤 브루크너의 인생 5막

    Anton Bruckner Museum in Ansfel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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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찌감치 재능이 싹텄던 유년 시절


    안톤 브루크너는 1824년 안스펠덴에서 마을 교사의 11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습니다. 당시 교사들은 교회 오르간 연주자 일도 겸했기에 브루크너는 교회와 오르간 음악에 둘러싸여 자랐습니다. 그는 바이올린과 피아노, 오르간을 배웠고 열 살의 나이에 이미 보조 오르간 연주자로 활동했습니다. 어려서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열두 살에 근처 성 플로리안 수도원의 소년 합창단원이 되고, 수도원 오르간 연주자에게 오르간 지도를 받았습니다. 

    아버지가 그랬듯이 브루크너는 교사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교사 일보다는 작곡과 오르간 즉흥 연주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또한 학교와 교회 일뿐만 아니라 밭일도 거들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음악 교육에 대한 브루크너의 열정은 누구보다 뜨거웠고 30년 이상 이어졌습니다.

    Organ at the Monastery St. Flor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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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업 음악가로 명성을 얻기 시작한 시절


    브루크너는 서른 한 살에 10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린츠의 성 플로리안 수도원 오르간 연주자로 채용되면서 음악가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1855년에 열린 오르간 연주자 채용 오디션에 참가할 마음이 없었지만, 결국 오디션에 통과해 연주자로 정식 채용이 됐습니다. 

    브루크너의 첫 교향곡은 1868년 린츠의 무도회장에서 초연을 해 좋은 평가를 얻습니다. 더 많은 관객에게 작곡한 음악을 알리라는 조언을 받은 뒤 비엔나로 향한 브루크너는 비엔나 음악원(비엔나 국립음악예술대학교) 교수직을 수락하고 음악 이론과 오르간 음악을 가르칩니다. 

    이때 음악가로서 진정한 첫 발을 뗐다고 할 수 있습니다.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의 궁정 오르간 연주자가 되었고, 성공적으로 작곡가 생활을 지속적으로 이어갑니다. 또 비엔나 음악원에서 오랜 시간 학생들을 가르치고 오르간을 연주하는 거장으로 많은 업적을 이루었습니다. 특히 그의 즉흥 연주 실력은 전설로 남았습니다. 

    브루크너는 낭시와 파리의 성당, 바트 이슐에서 열린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막내딸 결혼식에서 그레이트 오르간 즉흥 연주를 했습니다. 런던에서는 그의 연주를 보기 위해 관객 수천 명이 모이는 등 흡사 팝스타 같은 인기를 누렸습니다.

    Composer and Organist Anton Bruckner, about 1875 (picture deta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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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에는 오해를 받았던 거장

    브루크너의 가장 큰 열정은 오르간 연주가 아니라 교향곡 작곡이었습니다. 그는 이 분야에서, 특히 비엔나에서 인정을 받기 위해 더 열심히 싸워야 했습니다. 당시에는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교향곡을 뛰어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졌고, 음악 형식은 완성된 것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평생 동안 빈 필하모닉은 브루크너의 길고 기술적으로 까다로운 곡을 연주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빈 무지크페라인에서 3번 교향곡을 연주하는 동안 대부분의 청중과 오케스트라의 일부가 공연장을 떠났습니다. 안톤 브루크너는 비엔나 언론의 혹평을 두려워하여 자신의 작품을 비엔나 외곽의 여러 장소에서 공연했습니다. 심지어 그는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에게 자신의 가장 혹독한 비평가인 악명 높은 비엔나 음악 평론가 에두아르트 한슬릭을 제지해 달라고 청원하기도 했습니다: "폐하, 한슬릭이 저에 대해 나쁜 글을 쓰지 못하도록 금지해 주시기를 정중히 청합니다."

    죽기 8년 전인 60세가 되어서야 그는 7번 교향곡으로 그토록 갈망하던 성공을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이루어 냈습니다. 하지만 빈에서 그가 공식적인 인정을 받기까지는 2년이 더 소요되었습니다.

    Klimt roses deta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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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짜 로맨티스트 시절


    성실하고 겸손한 브루크너에게는 흥미로운 일화가 많습니다. 물론 부풀려진 부분이 없지는 않겠습니다. 한 예로, 브루크너는 사투리가 심했고 숫자 강박증이 있었다고 합니다. 창문이나 계단의 수뿐 아니라 악보의 마디 수를 계속해서 붙이는 행동에서 이런 강박증이 드러납니다. 또한 뛰어난 춤꾼이라는 소문도 있었습니다.

    자신보다 훨씬 어린 여성들에게 여러 차례 청혼을 한 이야기 역시 가십거리가 됐습니다. 그중 아홉 번은 기록에 남아 있는데, 청혼이 받아들여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합니다. 여자들을 대하는 데 서툴렀지만, 관심을 보인 여성은 꽤 많았다고 전해집니다. 언젠가 한 여성이 브루크너의 관심을 받고 싶어서 그에게 다가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수님, 제 쪽으로는 눈길도 잘 안 주시네요. 오늘밤 한껏 꾸미고 새 드레스도 입었는데 말이죠!” 이 말에 당황한 브루크너는 심한 사투리로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귀여운 아가씨, 나를 위한다면 아무것도 입지 말았어야죠!” 

    안톤 브루크너는 평생 ‘시골내기’로 살았습니다. 수도인 비엔나에 18년이나 살면서도 결코 비엔나 중산층의 관습을 따르지 않았고, 심한 사투리와 복장 탓에 상류층 틈에서 도드라졌습니다. 브루크너는 자신의 뿌리를 중시했고, 오버외스터라이히주에 대한 애착을 드러냈습니다. 또한 홀로 고독하게 작곡하고자 하는 내면의 강한 욕구에 충실했습니다. 바로 이런 성격이 완전히 새롭고 비범한 곡을 만들고 교향곡의 발전을 이끌어낸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Composer and Organist Anton Bruckner, dating unknown (picture deta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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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뒤늦은 인정을 받은 시절


    안톤 브루크너는 일평생 관습을 따르지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인정을 갈구하고 추천서와 추천장을 부탁했습니다. 노년에 접어들어서야 교육자이자 음악가로 그다지도 염원하던 대중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1886년,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가 안톤 브루크너에게 프란츠 요제프 십자 훈장을 수여하고, 교향곡 제3번과 8번의 인쇄 비용을 지원함과 동시에 그에게 예술가 연금을 지급했습니다. 1895년에는 거동이 불편해진 브루크너를 위해 벨베데레 궁전 상궁에 딸린 단층 주택을 무료로 내주었습니다. 그곳에서 브루크너는 생의 마지막 15개월을 지내면서 제9번 교향곡의 마지막 악장을 쓰는 데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하지만 곡은 끝내 미완성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안톤 브루크너는 1896년 10월 11일, 72세에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본인의 유언에 따라 시신은 성 플로리안 수도원 오르간 아래 안장됐습니다.

    음악가로서 안톤 브루크너는 당대 가장 위대한 혁신가로 손꼽히며, 그의 영향력은 그후 20세기까지 이어졌습니다. 

    안톤 브루크너의 발자취 따라가기

    오버외스터라이히주와 비엔나의 다음 장소에서 안톤 브루크너의 유산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Anton Bruckner Museum in Ansfel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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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톤 브루크너 생가

    안톤 브루크너 박물관

    린츠에서 기차로 15분, 자전거로 40분만 가면 안톤 브루크너의 생가가 있는 안스펠덴 마을에 도착합니다. 

    안톤 브루크너의 아버지가 거주하면서 교사로 일했던 과거 학교 건물에 자리잡은 안톤 브루크너 박물관에서 브루크너의 삶과 작품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안톤 브루크너가 실제로 사용한 실크해트, 조끼, 지휘봉, 오르간 테이블, 건반 악기 클라비코드 같은 물건들을 전시 중이며, 연극 티켓, 브루크너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장소의 풍경, 악보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안톤 브루크너의 생가에서 시작하는 교향곡 코스는 들판, 목초지, 언덕진 숲 지대를 지나 위대한 작곡가 안톤 브루크너가 묻힌 성 플로리안 수도원까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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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ycling tour along the Danube Cycle Path, Abbey of St. Flor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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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톤 브루크너의 오르간

    성 플로리안 수도원

    음악가로서 영향력을 발휘한 13년 동안 안톤 브루크너는 성 플로리안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의 소년 합창단원으로 시작해, 이후 교사와 오르간 연주자로 일했습니다. 수도원의 오르간은 17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안톤 브루크너 등의 음악가들이 연주했습니다. 당시 사용한 오르간 테이블은 오늘날 안스펠덴에 있는 브루크너의 생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성 플로리안 수도원은 브루크너의 마지막 안식처이기도 한데, 본인의 유언에 따라 그곳 오르간 아래 묻혔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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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ain Square and Trinity Colum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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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루크너 계단 & 브루크너가 연주한 오르간

    린츠 구성당

    안톤 브루크너가 연주한 악기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이 린츠 구성당에 있는 오르간입니다. 오늘날 이 성당에서는 수준급 오르간 콘서트가 주기적으로 열립니다. 

    또 다른 볼거리는 브루크너슈티게(Brucknerstiege), 즉 부르크너의 계단입니다. 성당의 오르간 연주자였던 브루크너는 총 57개의 단으로 이루어진 이 계단을 하루에도 몇 번씩 올라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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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nton Bruckner Private University, New buil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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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톤 브루크너 사립 대학교

    린츠는 200년간 음악 교육의 도시였다는 자부심이 있습니다. 안톤 브루크너 사립 대학교는 1823년에 성악가를 교육하는 학교로 설립됐습니다. 1863년, 안톤 브루크너가 학교의 총장 자리를 맡기로 했지만, 협상이 결렬되었습니다.

    푀스틀링베르크 언덕 위에 새롭게 들어선 이 대학교는 연구, 음악, 춤, 연극을 통합적으로 교육하며, 건축적으로도 흥미롭습니다. 아름다운 새 대학 건물은 악기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예술의 ‘공명판’을 의미합니다. 방문객들은 고전 실내악부터 오케스트라, 무용극, 인터랙티브 어린이 콘서트, 워크숍까지 다양한 공연과 행사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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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ruckner House / Lin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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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루크너하우스 콘서트홀

    린츠에서 안톤 브루크너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하루 여정은 브루크너하우스에서 열리는 콘서트로 마무리하면 좋습니다. 도나우강 바로 오른쪽에 있는 이 콘서트홀은 린츠 구시가와 보기 좋은 대비를 이룹니다. 콘서트홀에 들어서면 재즈부터 월드 뮤직, 클래식 음악, 오케스트라 공연까지 수준 높은 콘서트를 감상할 수 있습니다. 이곳은 연례 축제인 린츠 브루크너페스트를 포함한 여러 음악 축제의 무대이기도 합니다. 

    브루크너 오케스트라 린츠는 이곳에서 정기 콘서트를 엽니다. 오케스트라의 목표는 흉내내기 힘든 오버외스터라이히주의 방언을 활용해 브루크너의 음악을 독창적으로 해석한 공연을 선보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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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엔나 궁정 예배당

    1867년 2월 10일, 궁정 예배당의 음악 감독이자 브루크너의 열렬한 지지자 중 하나였던 요한 허베크가 비엔나 궁정 예배당에서 브루크너의 미사곡 중 하나를 초연했습니다.

    이 미사곡은 영적 표현력과 음악 구조 덕분에 순식간에 인정을 받았습니다. 이 초연은 브루크너의 음악 경력에 큰 획을 그었고, 작곡가로서의 명성을 확고히 해주었습니다. 이 연주 이후 궁정 예배당은 브루크너에게 새로운 곡을 의뢰했는데, 바로 걸작으로 손꼽히는 <미사 제3번 F단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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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per Belvedere Vienna, exterior view with po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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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톤 브루크너의 마지막 주소지

    벨베데레 궁전

    생의 마지막 몇 년 간 안톤 브루크너는 걷기도 힘에 부치게 되어 계단을 오르기가 벅찼다고 합니다. 이에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는 브루크너에게 벨베데레 궁전 상궁에 딸린 단층 주택을 하사했습니다. 이곳에서 브루크너는 생의 마지막 나날을 보내며 교향곡 제9번 작업을 이어갔습니다. 그리고 1896년 10월 11일, 브루크너는 이 집에서 심장병으로 삶을 마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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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arlskirche in vienna in summ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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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톤 브루크너와의 마지막 작별

    카를 교회

    1896년에 안톤 브루크너가 세상을 떠난 후 시신은 방부 처리해 비엔나의 카를 교회에 안치했습니다. 비엔나의 예술계 인사들이 모두 찾아와 브루크너와 고별 인사를 했습니다. 이날의 고별 미사는 오늘날 교회 벽의 기념 명판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브루크너의 유언에 따라 카를 교회에 안치했던 관은 비엔나 서쪽역에서 기차를 통해 성 플로리안 수도원으로 옮겨 수도원 교회 오르간 아래 안장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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