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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곤 쉴레와 풍경화

    요절한 천재 화가 에곤 쉴레의 이름을 들으면 인간의 나체를 리얼하게 묘사한 인물화가 가장 먼저 떠오르지만, 오늘날 미술계는 그의 풍경화에 주목합니다.

    에곤 레오 아돌프 루트비히 쉴레(Egon Leo Adolf Ludwig Schiele, 1890-1918)는 비엔나 근교 도나우강변에 있는 툴른(Tulln)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툴른은 도나우강을 내려다보는 계단식 밭과 양파 모양의 돔 교회, 웅장하고 화려한 바로크 양식의 수도원 등 마치 그림엽서에서 튀어나온 듯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진 마을입니다. 그러나 쉴레의 작품에는 이런 목가적인 풍경이 거의 표현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슬픔을 자아내는 작품이 대부분이지요. 아버지를 일찍 여의어서였을까요.

    당시 열네살이던 어린 쉴레는 상실감에 사로잡혀 지냈습니다. 1913년 어느날, 친구이며 의형제인 안톤 페슈카(Anton Peschka)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중략) 내가 왜 아버지가 살던 곳을 찾아 헤매고, 굳이 이 쓰라린 마음을 애틋한 시간 속에서 겪어내려 하는지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거야. (중략) 아주 조금이지만, 희미한 기억이나마 내 안에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지.”

    쉴레의 풍경화에 자주 등장하는 모습은 건물이 서로 기대듯 붙어있는 거리, 굽이진 길과 옥상, 도나우강 등의 하천에 있는 작은 강변마을입니다. 푸르른 산, 빛이 내리쬐는 습지대의 숲, 가을 나무들도 쉴레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이 그림들에는 사람이 없어서인지 쓸쓸하고 때로는 병적인 괴기스러움이 묻어납니다.

    레오폴트미술관의 큐레이터인 페레나 군퍼 씨는 쉴레가 그린 풍경이 초상화와 마찬가지로 연출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쉴레는 풍경이나 나무, 꽃에 인간적인 숨결을 집어넣습니다. 또, 도시 풍경을 유기적으로 그리고자 하는 의지가 강해 건물을 그릴 때 여타 작품에서처럼 직선이거나 딱 떨어지게 선 처리를 하지 않았지요.” 게다가 그가 그리는 자연은 빛바랜 꽃이나 시들어버린 나무, 저물어 가는 태양 등 생명의 순환을 강조한 것이 많다고 합니다.

    쉴레는 “사람들이 한여름에 가을 나무를 온 몸과 마음으로 느끼는 것과 같은 우울감을 고스란히 느끼도록 묘사하고 싶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풍경화는 중심 색깔이 브라운 계열이고, 디자인도 작고 풍경도 뒤엉켜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작품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감정이 담겨있고 이따금 고뇌가 표현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쉴레의 풍경화에는 특히 중세의 작은 마을이 많이 표현되었습니다. 어머니의 고향 체코의 크루마우 외에 니더외스터라이히 주의 마을이 비교적 자주 등장합니다. 그가 고향에 완전히 뿌리를 내렸고 전원 마을을 좋아했음을 말해주는 듯합니다..

    쉴레는 마치 도시 설계자처럼 마을을 그렸습니다. “만일 내가 화가가 아니었다면, (중략) 틀림없이 건축가가 되었을 거야”라는 말까지 한 걸 보면 말이죠.

    쉴레는 늘 작은 마을을 주된 거처로 삼았습니다. 처음에는 크루마우(Krumau)에서, 다음에는 니더외스터라이히에 있는 노이렌바흐 (Neulengbach) 숲에서 지냈지요. 노이렌바흐 숲은 빈에서 가까운데도 완만한 언덕과 숲의 경사면, 시골스러운 작은 마을이 흩어져 있는 곳입니다.

    쉴레는 이곳에 칩거하면서 시끌벅적한 비엔나에서 벗어나 자연을 벗삼아 조용히 창작에 몰두했습니다. 숙부에게 보낸 편지에, 그는 “(중략) 저는 이곳에 영원히 머무르면서 위대한 작품을 완성하고 싶습니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 시기 작품에는 <은둔자들> <까마귀가 있는 풍경> <상복을 입은 여인>, 그리고 인상적인 풍경화들과 <바람 속의 가을나무>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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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쉴레가 그린 인물화의 특징

    쉴레가 그린 인물의 대부분은 평평한 배경에 밝은 색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얼굴 선과 윤곽은 종종 스케치 같은 터치로 강조해서 묘사되어 있습니다.

    <줄무늬 셔츠를 입고 있는 자화상> 1910년, 레오폴트미술관, 비엔나

    유년 시절

    Egon Schiele (umjetnik), željeznica (dječji crtež), oko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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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차에 푹 빠진 소년

    역장의 아들로 태어난 소년 쉴레가 처음 관심을 둔 주제는 당연하게도 기차였습니다. 쉴레의 가족은 툴른의 기차역 위에 지은 아파트에 살았기 때문에 어린 쉴레는 창밖을 내다보면서 몇 시간 동안이나 기차와 기관차를 그렸습니다.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거든요. 학교에 다닐 적에도 수업 중에 그림을 그려서 선생님을 난처하게 했답니다. 자연스레 성적도 좋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Egon Schiele, Häuser auf dem Klosterneuburger Rathausplatz,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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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로스터노이부르크의 학교

    열두살에 비엔나 근교에 위치한 클로스터노이부르크(Klosterneuburg)의 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쉴레에게는 다행스럽게도 그곳에서 미술 선생님인 루트비히 카를 슈트라우흐(Ludwig Karl Strauch)를 만나 예술적 재능을 인정받았고 학업 지원도 받았습니다. 당시 클로스터노이부르크에서는 예술 활동이 매우 활발했는데, 쉴레는 슈트라우흐 선생님을 통해 새로운 예술을 접했고 다른 예술가들과 교류할 기회도 얻었습니다. 1902년부터1906년까지 지낸 이 지역에서 그는 자신의 목표를 구체적으로 설계했습니다.

    Egon Schiele, Stadt Stein II,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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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하우(Wachau) 계곡

    쉴레는 성인이 된 후 더 이상 기차를 그리지 않았지만, 여전히 기차를 좋아했습니다. 여행을 많이 다니지는 못했어도 여러 차례 바하우를 찾았고 도나우강의 슈타인을 주제로 그림들을 그렸습니다. 쉴레에게 바하우는 유년 시절 동경한 고장이었습니다. 크렘스에서 학창시절을 보내면서 도나우 밭을 자주 지나다녔지요.

    비엔나의 프란츠 요제프 역에서 바하우로 향하는 열차는 쉴레의 고향 툴른을 경유합니다. 도중에 툴른에서 내려 쉴레의 생가와 쉴레 미술관을 둘러보셔도 좋습니다.

    부르주아적인 격식을 혐오하고 성적 자유를 부르짖은 쉴레

    비엔나에서의 학창 시절

    쉴레는 열여섯살에 비엔나으로 상경해 비엔나미술아카데미에 입학했습니다. 그러나 보수적인 교육 환경에 금방 싫증이 났습니다. 당시 교수였던 크리스티안 그리펜켈(Christian Griepenkerl)도 쉴레를 썩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습니다. “제발 부탁이니 내 제자라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주게!”라고 쉴레에게 부탁할 정도였다지요. 결국, 쉴레는 3년만에 아카데미를 그만두고 지인들과 ‘신예술그룹(Neukunstgruppe)’이란 예술 동인을 결성했습니다.

    비엔나에서 쉴레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들을 알게됩니다. 경애하는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친구이자 뮤즈였던 발리 노이칠(Wally Neuzil), 그리고 훗날 아내로 맞은 에디트 헤름스(Edith Harms) 모두 비엔나에서 만났습니다.

    영화 <에곤 쉴레: 욕망으로 그린 그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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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속박에서 해방된 삶

    19세기 말 비엔나에서는 부르주아적인 격식이나 도덕적 제약을 거부하는 문화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지크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이 시기에 《성욕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를 집필했습니다. 쉴레 역시 비엔나의 열기 속에서 자기만의 표현주의 스타일을 정립하고 성적 묘사를 가장 도발적으로 표현하는 작가 중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독일 언론 <노이에 프레스>지는 1912년에 “쉴레는 지금까지 비엔나에서 만난 사람 중 가장 불쾌한 정도의 이상한 면모를 지니고 있다”라고 보도했습니다. 그로테스크한 생물이나 남녀의 누드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쉴레는 ‘에로틱한 예술 에도 신성함은 있다’라는 말로 자신의 예술에 확신을 품었습니다.

    28년의 짧은 생

    1918년, 에곤 쉴레는 비엔나에서 스페인 독감에 걸려 스물여덟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습니다. 꿈에 그리던 명성을 손에 넣으려던 찰나였지요. 짧은 삶 동안 경이로운 작품들을 남긴 쉴레는 생전에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내가 죽은 후에는 이르건 늦건 사람들이 반드시 나를 칭찬하고 내 예술을 찬미할 것이다.”

    이 말대로 오늘날 에곤 쉴레의 작품은 국제 옥션에서 고가에 거래되고 있지요.

    쉴레 풍경화의 배경지

    • Egon Schiele, Mesto Stein an der Donau in Stein an der Donau da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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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슈타인 안 데아 도나우(Stein An Der Donau)

      에곤 쉴레는 장성한 후에도 유년 시절을 보낸 바하우를 여러 번 방문했습니다.

    • Egon Schiele, Am Donaukanal, 1907 und Donaukanal heu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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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비엔나 도나우 운하

      이 그림은 1907년 여름에 그린 것으로 추정됩니다.

    • Egon Schiele, The Abbey Carpentry, 1907 and the Abbey Carpentry (Klosterneuburg Abbey) today / Stift Klosterneubu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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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클로스터노이부르크 수도원

      1906∼1908년까지 <수도원 대공사장>(1907) 등 클로스터노이부르크를 모티브로 그린 유화 작품이 몇 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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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엔나 미술관에서 쉴레를 만날 기회

    레오폴트미술관 (비엔나)

    뮤제움스콰르티에(MQ) 일각에 있는 레오폴트 미술관은 쉴레의 회화 42점, 수채화 184점, 드로잉, 판화, 그리고 다수의 자필 편지를 아우르는 세계 최대 규모의 쉴레 컬렉션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레오폴트미술관은 <1900년-근대의 막이 오른 비엔나(Wien 1900)>라는 주제로, 쉴레를 비롯해 동시대에 활약한 구스타프 클림트, 오스카 코코슈카(Oskar Kokoschka), 콜로만 모저(Koloman Moser)의 걸작들과 비엔나 공방에서 만든 공예품 등을 모아 대규모 상설 전시를 마련했습니다.

    또, 벨베데레 궁정 미술관이나 알베르티나 미술관도 중요한 컬렉션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더 보기

    에곤 쉴레의 발자취를 따라가보는 니더외스터라이히 주

    Bahnhof Tulln a.d. Donau / Tull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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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곤 쉴레의 생가

    에곤 쉴레의 생가

    쉴레 가족은 툴른역 역사 위에 위치한 집에 살았으며, 여동생과 누나들과 함께 자랐습니다. 재건된 방에서는 쉴레의 깜짝 놀랄 소년 시절을 알게 될 것입니다.

    클로스터노이부르크 수도원

    에곤 쉴레는 1909년에 클로스터노이부르크 수도원에서 개최한 공모전에 처음으로 참가했습니다.

    에곤 쉴레 미술관

    툴른에 있는 쉴레 미술관에서는 에곤 쉴레의 개인적인 생활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해마다 다른 작품을 전시하는데, 근처 에곤 쉴레 거리도 거닐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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